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저자가 2010년 이후에 발표한 평론 중 90편가량의 짧고 긴 글들을 모은 책이다. 세월호 참사와 더불어 아내의 수술 등, 안팎으로 슬픔이 잦았던 시기를 특유의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기록해냈다. 일종의 비망록처럼, 다사다난한 삶을 버텨내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그는 타인과 그 슬픔을 이해하려는 정확한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그 고민을 시와 소설, 영화, 음악, 사진과 같은 다양한 예술작품 및 사회 일반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풀어낸다.
저자는 이 책 내내 독자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어디까지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단 하나의 오차 없이 정확히 같은 고통을 두 사람이 마주했다고 가정해 보자. 똑같은 과정을 통해 그 고통을 지나쳐 왔으며, 고통을 겪어낸 기간 역시 같다. 그렇다면 같은 슬픔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서로를 완전히 이해한다 할 수 있을까. 이 같은 담론에는 저자만의 섬세한 통찰이 깔려있다. 이를테면, 영화 <터널>의 주인공 ‘정수’를 두고 트라우마에 대한 인식을 재고할 때가 그렇다. 저자는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여전히 그 상처에 뚫려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이제는 괜찮아지라며 쉽사리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이소라의 <슬픔 속에 그댈 지워야만 해>를 듣고서는 고통을 말하기에 앞서 고통 그 자체가 되어버린 예술이 어떤 감동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예술이 듣는 이로 하여금 얼마큼의 위로가 될 수 있는지 말이다. 황인찬 시인의 <구관조 씻기기>를 심사한 후에는 삶이 아직 “어두움과 어지러움”, 즉 무지 속에 머무를 때조차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종의 슬픈 예감에 관해 쓴다. ‘삶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이면에서는 죽음 같은 슬픔’이 존재한다고.
저자는 한 칼럼에서 19세기의 공부를 일컬어 “나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공부”라 말했다. 개인의 궁극적인 목적은 잠재력을 계발하여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이었으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기를 방치, 학대, 파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 또, 저자에 따르면 공교육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이자 의무가 된 그다음 시대의 공부는 출세의 사다리에서 상층부에 올라가기 위한 경쟁 수단이었다. 다시 말해,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집념의 한 표현”이자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공부”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또 다른 공부가 필요하다. 나를 위한 공부가 아닌 “나로부터 타인을 지키기 위한 공부”. 슬픔을 공부한다는 건 “내 안에 뿌리내린 맹목과 편향에 대한 자기 교정”이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편을 가르고 쉽게 타자화하며 혐오문제가 불거지는 요즈음이다. 그렇기에, 결국 사람은 사람이 필요하며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작가의 시선이 더욱 반갑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통해 타인의 슬픔을 다루고 어루만지는 방식에 대해 골몰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